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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하·워라블’ 유니버스

소제목
그리하여 ‘원도심’이라 부른다
글쓴이
고미 크립톤엑스 제주사업본부장
코너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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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도 다른 생명체처럼 수명이 다해서 죽을 수 있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공공경제학자인 데이비드 커틀러 교수와 같이 쓴 《도시의 생존》의 1장 첫 줄이다. 십 수년 전 《도시의 승리》라는 책으로 도시의 발전에 대한 기대를 아끼지 않았던 학자의 고해성사와 같은 말은 현실이지만, 또 그렇지 않다. 언제부턴가 소멸이란 단어를 공공연하게 쓰고 있지만 아직 사라진 곳을 찾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다. ‘언젠가’는 무서운 경고라기보다는 ‘그러니’ 하는 적합한 대안을 묻는 장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의외로 간단하게 답할 수 있다. “제주시 원도심을 보면 된다.”
글. 고미 크립톤엑스 제주사업본부장 사진. 고미, 이성근
제주 원도심 산지천
손 써볼 틈 없이 힘 잃은 ‘옛’ 공간
흔히 알고 있는 도시라는 개념 속에서 ‘제주시 원도심’은 아픈 손가락이다. 한때 도시 발전의 중심축 역할을 하던 공간은 도시 확장·개발이라는 구도 안에서 손써볼 틈도 없이 쇠약해진다.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고, 또 그 사이 개발사업이 진행됐고 하는 기록은 이유라기보다 변명에 가깝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원도심이라고 하는 얘기도 점점 힘이 빠지고 있다. 관심이 없어진다기보다는 더 무엇을 해야 하나 싶은 안타까움이 더 강하다. 그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그러니 뭐라도 해보자고 하지만 생각보다 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원도심의 곳곳을 유심히 살피다 보니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어느 한순간 만들어진 시·공간이 아닌데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있었다. 원도심 회복을 위해 제안된 것 중 사실 처음인 것은 없다. 주민들이 원치 않아서, 상점가 동의를 얻기 어려워, 아직 그곳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등등 수많은 이유가 원도심이 지닌 힘을 놓쳤거나 애써 못 본척하고 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을 안쓰럽게만 보고, 이런저런 명분을 더해 예산을 투입하며 애써 스스로 일어나려는 의지를 흔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 활기를 띠었던 원도심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이정표
그 안에 숨겨진 ‘뜨거운 심장’
그렇게 다시 본 제주시 원도심은 언제고 다시 뛸 뜨거운 심장을 감추고 있다. 기원전 5세기 탐라국부터 켜켜이 쌓아 올린 제주 섬의 중추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횡으로 넓히거나 고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보편적인 도시 성장과 달리 제주시 원도심은 몸집을 부풀리는 대신 사람을 부르는 것으로 내성을 키우고 있다. 지금까지 학습했던 방법 그대로. 제주시 원도심의 구성은 특별하다. 화산 폭발로 섬이 만들어진 이후 삶으로 밟아 다진 공간이 있는가 하면, 대홍수를 겪으며 무너지고 유실된 후 남은 곳, 그리고 계획 수립에서 1·2차 매립까지 15년에 걸쳐 사람의 손으로 만든 땅까지 얼기설기 연결돼 있다. 탐라 시대부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했던 터전에서 도로 하나를 지나면 이제 사람과 호흡한 지 100년 정도 된 땅이 있고, 다른 방향으로는 잘해봐야 30년보다 조금 더 쓴 땅이 있다. 그 위를 바람만이 아니라 사람, 무엇보다 삶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흐른다. 이 모든 걸 단순히 도시 계획, 도시 재생이라는 말로는 가늠할 수 없어 결국 사람을 부르고 또 부른다. 제주시 원도심은 과거 제주 읍성의 흔적을 얹어 원형의 제주시 원도심은 과거 제주성과 제주목, 오현단, 삼성혈 같은 명소와 더불어 동문시장(재래·공설·수산시장), 칠성통 등 상점가를 중심으로 힘을 키웠다. 2010년을 전후해 제주성 중심의 역사문화유산 복원과 걷는 거리·문화공간 조성, 상권 활성화 시책 같은 도시 재생 사업으로 변화를 시도했지만,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보호 본능을 심하게 건드렸다. 물리적 공간 배열 측면에서 유인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장·상점가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마저도 사회경제 환경 변화 속에 힘을 잃고 있다.
산지천을 따라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상권
원래 상권, 그리고 둘레 상권
에드워드 글레이저 교수의 경고처럼 ‘수명을 다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공공기관이 떠나고 금융기관과 병원이 따라가고, 상점가 기능이 약해졌다고 해도 그 안의 다양한 인간 활동과 상호 작용까지 흔들지는 못했다. 병원과 금융기관이 떠난 공간에 자리 잡은 중간 지원 조직은 물론이고 이전 숙박시설 등을 리모델링한 미술관 등 재생 공간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순한 선형의 동선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몇 번이고 마주치고 익숙함을 느껴가는 사이 만남과 결속의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 기존 상점가에 진입하지 못한 로컬크리에이터와 청년·이주 창업가들은 과거 성안에 들어오지 못해 성 외곽에 노점을 만들었던 것처럼 나름의 영역을 만드는 것으로 원도심을 지지하고 있다. 제주 무근성을 기반으로, 또 남성로와 한짓골을 잇는 거리에, 제주 산지천을 따라 하나둘 자리를 잡고 연결되면서 또 하나의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파리에 돋은 맥이 다시 가지를 뻗기 위해 에너지를 모아 펼치는 그런 형상이다. 그 모습이 원래 상권을 둘러싸고 원도심의 빈틈을 채우는 둘레 상권의 형태를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곳을 상징하는 무엇’ 같은 랜드마크적 존재가 아니라 유사한 성격·성향의 플레이어들이 모여드는 일종의 ‘워라하(Work-Life Harmony)’ ‘워라블(Work-Life Blending·일과 삶이 자연스럽게 섞임)’ 유니버스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24 J-CONNECT Day & 로컬페스타’ 원도심 투어
감각적 나선형의 원도심 Time
여기에 도시 브랜드를 평가하는 ‘NICE+P’, 경관·장소(Nature&Heritage), 도시 기반(Infrastructure), 도시의 질(Culture&Lifestyle), 일자리 창출과 기회(Economy), 도시 개성과 매력(Personality, People, Policy) 요소를 덧대면 보다 흥미로워진다. 오래된 시간과 경험, 삶이 겹겹이 포개져 있으면서도 과거 도시를 형성하며 구축했던 인프라 위로 걷고 싶고, 살고 싶고, 뭔가 하고 싶은 니즈가 모이는 공간이라면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제주시 원도심은 지금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빈 점포가 늘어나고 고령화·공동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단순히 크고 화려한 건물과 예산이 없어서인가 하고. 제주센터가 올해로 7번째 마련한 ‘J-CONNECT Day & 로컬페스타(이하 제이커넥트데이)’가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제주 원도심 일대에서 열렸다. 로컬 창업가의 가치를 알리고, 지역 상권 활성화를 위한 소통의 장에 원도심의 변화를 알리는 역할로 참여했다. ‘과연 얼마나 통할 것인가’ 했던 걱정은 시작과 함께 사라졌다. 예상보다 일찍 해가 져서 가뜩이나 제주시에서 가장 어두운 곳을 서둘러 살펴야 하는 미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원도심의 배경은 이렇고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저렇게 변해왔고, 달라지고 있다는 귀띔이 전부였는데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들과 다시 살피니 보이는 것 그리고 다가가 함께해 보면 좋을 것들을 찾았다는 반향이 전해진다. 충분하다. 옛 주민들이 떠난 빈집이나 상점에 새로 간판이 걸리는 일이 이제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그 변화가 더 매력적인 것은 소소하고 느린 움직임이라 세심히 살펴야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원도심이어서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과 주차하기 힘든 곳이라는 약점이 다시 사람 들게 하는 일에는 강점으로 작동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꿈꾸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인간적 연결성에 대한 깊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에 끌린다. 제주시 원도심의 시간은 여러 출발점에서 시작해 돌고 돌고 또 돌아 관용적 사고와 융합, 확장 등을 아우르는 감각적인 나선형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정해진 답은 없다. 도시도 그렇지만 도시를 이루는 공간, 그중에서도 오래 자리를 지키며 생명력을 응축해 온 공간의 힘은 더불어 사는 데서 나온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있는 제주시 무근성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