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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길을 내는 기세라 쓰고, 제주라 읽다

날짜
2024/01/19
상태
노출
텍스트
크립톤엑스 고미 제주지역본부장
섬이어서. 제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섬’은 어려웠던 배경을 설명하는 일종의 보호 장치였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고립’된 공간이었고, 바다를 건너야 하는 악조건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 그것뿐이라면 ‘오늘, 제주’는 세기말 우울감이 짙게 감도는 어느 도시의 느낌이었을 터다. 하지만 여전히 기회의 땅이라 한다. 이게 뭐지, 과연 무엇이 있는 것일까.
출처: 제주관광공사, Visitjeju.net
‘제판(濟坂)항로’ 개항 100년
올해 제주에 등장한 키워드 중에 ‘제판(濟坂)항로’가 있다. 메이지유신 후 일본의 근대화·산업화 속도가 빨라지는 사이 말 그대로 ‘기회’ 하나만 보고 바다를 건넜던 제주 사람들의 서사를 상징하는 단어다. 일제강점기 일본식 자본주의 구축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득을 취하기 위한 자본 잠식과 시장 장악 공세는 셈보다는 정에 기울었던 그 시절 조선, 특히 제주 사람들에게는 대형 태풍 수준이었다. 물론 그 기회가 모두 분홍빛은 아니었다. 근대화 속도와 전쟁 여파까지,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일본의 사정은 ‘기회’라는 이름으로 포장됐다. ‘입 하나는 줄이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이유는 태어나 섬을 떠나는 큰일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람들의 등을 바다 건너 이국까지 떠밀기에 충분했다.
제판항로는 제주와 일본 오사카(大阪)를 잇는 1923년 ‘군대환(君が代丸·기미가요마루)’, ‘제판(濟阪)연락선’의 취항으로 열렸다. 당시 제주 인구의 ‘4분의 1 이상(1934년 추산 재일제주인 5만 명)’이 이 바닷길을 통해 일본행을 선택했을 만큼 엄청난 역할을 했다. 사람만 나간 것이 아니라 그동안 멀었던 정보와 문물 같은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왔다.
섬 안의 변화가 늘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분명 사회에 크고 작은 변화를 이끌었다. 제판항로가 열렸던 것은 그 만큼 수요가 있었다는 얘기도 된다. 일본 오사카에 남아 있는 제주 관련 자료를 보면 제판항로가 열리기 전인 1915년 4월 제주-부산 항로 개설 이후 제주에서 건너간 ‘자주(自主)’도항의 흔적이 종종 발견된다. 이후 제주에서 계절근로자 성격의 사람을 모집하는 광고가 등장하고, 그다음 제판연락선 취항의 수순으로 이어진다.
현해탄 건넌 제주해녀들
‘다음’을 믿고 움직이다
그래서 일본을 통해 얻거나 받아들인 것들만 있었는가 하면 ‘다음’은 보다 더 흥미롭다. 해녀의 예를 들어보자.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을 피해 감태 채취 등 노역으로 일본에 건너간 해녀들의 삶은 퍽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긴 노동시간은 물론이고 낮은 품삯과 비인간적인 처우 속에서 깊고 험한 바다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현지에 남은 해녀들은 현지 텃세를 피해 점점 먼 바다로 갔다. 처음은 오사카에 밀집됐던 해녀들의 흔적을 치바현 미나미보소(南房総總) 아와군 쿄난마치(安房郡鋸南町)까지 가서 찾은 적이 있다. 당시 지역 90대 노 아마(海女)의 기억은 특별했다. 줄잡아 70여 년 전 제주해녀들의 작업 광경은 작은 어촌 마을을 뒤집었다.
남성들이나 하던 깊은 바다, 먼바다 작업을 하는 것도 대단했거니와 가족, 특히 자식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마을 분위기까지 바꿨다. ‘여자도 할 수 있는 일’을 확인했고, 목소리를 모아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과정과 부지런히 노력(공부)하면 대도시에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면서 지역에 주민협의기구가 만들어지고 평균 소득이 올라간 것은 물론이고 교육열까지 후끈 달아올랐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아직 남아 있었다.
그저 그럴 수도 있는 ‘그때는 말이야’가 아닌 사연은 더 있다. 제판항로를 독점적으로 운영하던 조선우선(朝鮮郵船)과 아마가사키사(社)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오사카 거주 제주도민들이 운임 인하와 대우 개선을 목적으로 ‘자주 운항 운동’을 시작하고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이라는 선박협동조합(1929년)을 만들어 직접 배를 띄운다. 지역단체와 연대에도 불구하고 좌초 사고와 경영난, 일본 당국의 탄압 등으로 1934년 해체하기는 했지만 방법을 찾고 움직였다.
재일제주인의 삶을 그린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일본 개봉명: 야키니쿠 드래곤)’
각인된 경험 그리고 로컬화
차별과 인권 유린, 가난과 굶주림으로 처참했던 일본에서의 삶은 ‘이카이노(猪飼野·돼지나 키우던 하찮은 들판)’에서 오사카 재일한국인들의 중심지인 이쿠노구(生野區)로 변화했다. 하천 준설 공사를 위해 대거 동원됐던 제주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황폐한 땅과 하늘을 겨우 가릴 수주의 판자촌이 전부였지만 이후 하천을 따라 가건물과 음식점들이 들어섰고, 제주의 풍습과 전통을 품은 제주인 집성촌 ‘이쿠노구’를 이뤘다. 제주에서 먹던 음식이나 생필품을 서로 나누다 시장(쓰루하시)이 만들어졌고, 힘들어도 그 안에서 방법을 찾던 생활 방식이 ‘호루몬(ホルモン)야키(ヤキ)’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 후 미군정은 일본 내 조선인을 조국으로 귀환시켰지만, 일부는 그대로 눌러앉았다. 1948년 제주4·3 당시 밀항으로 피신해 온 사람들까지 그렇게 오사카의 재일조선인 사회가 형성됐다. 이 과정에 졸지에 난민이 된 사람들은 의사, 장사, 아니면 야쿠자(조직 폭력배) 외에 다른 선택지를 가질 수 없게 됐다. 호르몬은 그 틈에서 나왔다. 당시 일본인들은 소나 돼지의 내장을 먹지 않고 버렸다. 그렇게 버려진 내장을 재일한국인들이 모아서 음식으로 만들어 먹고 팔기 시작했다. 오사카 식당에서 일하던 제주 출신 요리사가 처음 선보였다는 설(說)이 꽤 유력하다. 그 시작점으로 알려진 오사카 츠루하시(鶴橋)의 야키니쿠 거리가 꼽히는 점은 물론이고, 애저회를 먹고, 돼지의 어느 부위도 버리지 않고 요리해 먹었던 제주 식문화를 감안하면 수긍이 간다.(2018년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야키니쿠 드래곤(焼肉ドラゴン)’의 주인공도 제주 출신 자이니치(在日)다.)
이제는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호루몬 야키’ 전문점이 생길 정도로 유명해졌다. 슬픈 사연이 있다고 하지만 돌려 생각해 보면 로컬이 다른 로컬을 만들어 돌아오는 구조를 확인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앞의 예들도 그렇다. 조합을 구성해 자본을 움직이는 방식을 공유하고, 창업 등을 연결한 지역 생태계를 만들고, 지역화를 통해 다시 기회와 경쟁력을 만드는 것은 지금도 주문하고 또 유효한 일이다.
양털을 이용해 옷을 짜는 한림수직 직원들과 맥그린치 신부
제주-아일랜드, 섬의 윤회
제주 사람이어서 이런 흐름을 좋게만 해석한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그렇지 않다. 여럿의 기억 속 ‘타이타닉’은 애틋한 러브 스토리와 도입부만으로도 ‘아’ 하는 OST, 극적인 결말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아일랜드 이주 역사가 깔려 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잉글랜드의 탄압에 못 이겨 새로운 땅 즉 신대륙인 미국으로 이주했다. 100만여 명이 굶어 죽었던 아일랜드 대기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미국 역시 영국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바다를 건너야 했다.
아일랜드와 제주와 인연 역시 특별하다. 제주에서는 ‘푸른 눈의 돼지 신부’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고(故) 패트릭 J.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도 아일랜드 출신이다. 제주4·3과 한국전쟁 이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주 도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는 한림성당 부임 이후 지역 학생을 중심으로 ‘4H(머리·Head, 가슴·Heart, 손·Hand, 건강·Health) 클럽’을 만든다. 고향 가족들이 보내 준 후원금으로 구입한 양 35마리의 털로 만든 실로 ‘한림수직(1959~2005)’이라는 로컬 의류 브랜드를 만들었고, 닭과 돼지 종자를 나눠주는 ‘가축은행’도 꾸렸다. 제주 최초의 신용협동조합 창립이나 제주 축산업의 기초가 된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구성 등 당시 섣불리 선택할 수 없었던 길을 냈다.
기성복과 중국산 저가 공세에 밀려 사라졌던 ‘한림수직’의 이름이 부활한 뒤로 유사한 형태의 로컬 아이템이 부지런히 부상(浮上) 중이다. 아일랜드 전통 무늬인 아란 패턴의 호흡을 고향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시작됐다는 얘기가 들린다.
제주창경, 가슴 뛰는 ‘데자뷔’
2023년 한 해 제주센터의 걸음은 마치 100년 전 예상하지 않았지만 가야만 했던 길 위에 있는 듯한 데자뷔(deja vu)를 보는 듯하다. 지역적 특성을 배경으로 로컬 크리에이터 발굴과 성장을 지지했던 과정은 6번째 J-CONNECT DAY 행사로 꽃을 피웠다. 로컬 중심 전국 네트워킹 콘퍼런스의 씨앗으로 올해 전국 곳곳에서 숨 쉴 틈 없이 이어진 프로그램들에 ‘가능해’, ‘해봐’의 응원을 던졌다. 특히 올해 강한소상공인성장지원사업과 시드머니 투자, 민간투자 연계형 매칭융자 지원 등 ‘로컬크리에이터 스케일업’이라는 열매 맺음을 정조준했다.
올해 제주 지역 최초로 팁스 운영사에 선정돼 투자와 오픈이노베이션을 연계한 활발한 행보를 이어갔다. 해외시장 진출을 지원하는 글로벌 사업의 타깃이 일본이었던 점 역시 ‘새로운 연결’이라는 제주센터의 방향성과 연결된다. 일본 진출 스타트업 투자를 위해 재일교포 출자를 통한 펀드 조성에 나서는 과정이 새삼스럽지 않게 느껴진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경제와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흐름을 알고 신중하게 아카이빙 하는 것은 역사에 있어 반복되는 과정에 있다. 분명 그때도 도전했고 열었으며 쉽지 않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었다. 지역에서 익힌 것들이 살과 힘이 되고 경쟁력으로 컸다. 그래서 기회고, 그 단어에 가슴이 뛴다. 그대들도 그렇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