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완 아라리오 제주 대표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지만, 예술의 수명은 무한하다’라는 말처럼 예술의 생명력은 세대를 뛰어넘는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 예술을 토대로 지역의 가치를 높인 사례는 이에 대한 방증이다. 원도심의 오랜 역사와 예술의 만남으로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김지완 아라리오 제주 대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아라리오는 어떤 기업인가요?
‘예술을 사랑하는 기업’이라는 말이 아라리오의 정체성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아라리오 제주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진행 중인 아라리오의 다양한 프로젝트 목적이 결국 예술로 귀결되는 것도 이러한 기업의 운영철학에서 기인합니다.
아라리오는 오랫동안 국내 유망 작가들의 육성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펼쳐왔어요. 기업의 주요 사업 및 프로젝트의 중심축이 이러한 육성정책으로 성장한 작가들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아라리오 제주도 이러한 기업 운영방침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지난 2014년 제주 원도심 내 미술관 개관을 시작으로 다양한 공간을 구축함으로써 예술의 가치를 알리는 마중물이 되고자 합니다.
아라리오 제주의 정신을 담은 ‘아라리오 로드’를 구축 중이신데요.
아라리오 제주가 추구하는 목표는 제주도가 가진 잠재력을 예술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콘텐츠로 구현해내는 것입니다. 아라리오 뮤지엄을 비롯해 탑동시네마 미술관, 아라리오 동문모텔 등을 잇는 ‘아라리오 로드’가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난 2020년에는 해외 기업과의 협업으로 ‘디앤디파트먼트 제주’를 출범시키며 계획에 추진력을 더했습니다.
이처럼 원도심의 오래된 건물을 재단장해 선보인 미술관과 갤러리, 레스토랑, 복합 문화공간 등은 ‘아라리오 로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여러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가 됐습니다. 앞으로도 아라리오 제주는 지역에 스며들어 있는 역사와 이야기를 재구성함으로써 제주도의 새로운 명소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2020년 출범한 디앤디파트먼트 제주
주로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 공간을 만들었죠. 신축보다 리노베이션에 집중하는 까닭이 뭘까요?
오래된 건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건물에 녹아있는 역사와 이야기는 곧 지역을 대표하는 콘텐츠와 다름없죠. 영국 런던 남부의 빈곤 지역에 세워진 발전소를 리노베이션한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역의 흉물로 여겨지며 오랜 시간 주민들의 골칫거리에 불과하던 발전소가 간단한 리노베이션을 통해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훌륭한 관광 명소로 재탄생했죠. 일본의 나오시마섬 역시 환경 오염으로 인해 외면받던 지역이 예술을 기반으로 부활에 성공한 좋은 사례입니다. 오랜 역사와 이야기에 예술을 불어넣음으로써 전혀 새로운 공간이 된 것이죠.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시네마는 지난 2005년 문을 닫은 제주 최초의 복합 상영관이 있던 위치를 이어받았습니다. 미술관 이름에 옛 지명을 그대로 붙였어요. 당시 탑동시네마 1층에는 유명 햄버거 프랜차이즈가 있었는데, 그때의 노란색 타일을 그대로 살림으로써 역사의 연속성을 이어가고자 했습니다. 예전 영화관을 기억하는 이들은 향수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역시 과거의 흔적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여러 객실로 구성된 기본적인 건축형태를 유지하되 방마다 다른 분위기의 전시 공간을 연출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과거와의 만남’이라는 주제도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라리오의 근간은 예술이고, 미술관은 아라리오의 영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은 특정 자본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라리오는 오히려 미술관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라리오가 제주도에서 미술관을 개관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을 알리고, 이를 통해 지역의 활성화를 이끌어내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아라리오 로드’가 바로 이러한 목표를 현실화해나가고 있는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시네마의 노란색 타일
아라리오 로드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어요?
이른바 ‘뮤지엄 박스(Museum Box)’라는 단어로 압축됩니다. 미술관을 중심으로 여러 콘텐츠가 함께 공존하는 새로운 공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간이 특정 건물에서 구현될 수도 있지만, 여러 길을 아우르는 거리 혹은 동네 전체를 무대로 실현된다면 특별한 가치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탑동에서 아라리오 뮤지엄을 중심으로 지역 내 골목들을 연계하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 배경이죠.
아라리오 뮤지엄을 중심으로 새로운 길을 그리게 된다면 인근의 탑동시네마와 산지천 너머 동문모텔까지 연결되는 아라리오 로드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다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해요. 미술관만으로는 아라리오 로드가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다는 한계가 있는 까닭입니다. 물론 아라리오 로드를 비롯한 아라리오 제주의 모든 프로젝트가 문화·예술의 활성화로 귀결되는 건 사실이지만, 이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이 선행돼야만 합니다. 때문에 아라리오 제주는 길과 골목에 다양한 콘텐츠를 채워 넣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작품들을 감상한 후 음료와 음식을 즐기거나 쇼핑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라리오 뮤지엄과 탑동시네마, 디앤디파트먼트를 중심으로 ‘카페 크림’, ‘파도 식물’, ‘프라이탁’, ‘포터블’ 등 소위 ‘핫’한 브랜드를 유치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조 나가사카와의 협업이 이뤄진 배경이 궁금합니다.
사실 예전에 미술관을 만들 때는 건축의 중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공간에 집중하기보다는 작품들의 배치를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당시에 직접 운영했던 카페나 식당 등도 그저 낡은 건물을 개조해 사용했을 뿐, ‘이거다’라고 여길만한 특색을 부여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의 큰 실패 이후에 건축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됐습니다. 카페면 카페답게, 레스토랑이면 레스토랑답게, 상점은 상점답게, 업종별로 갖고 있는 본질과 개성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됐죠.
좋은 건축가를 물색하던 중에 디앤디파트먼트의 창업자인 나가오카 겐메이 씨의 추천으로 조 나가사카(Jo Nagasaka)와 인연이 닿게 되었습니다. 나가사카는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건축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제시한 ‘보이지 않는 개발’이라는 콘셉트를 확인한 후 곧바로 그와의 협업을 결정했습니다. ‘원래 여기에 있을 법한’ 건축물을 만들겠다는 콘셉트야말로 아라리오 제주의 정체성과 맞아떨어진다는 확신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탑동에서 어떤 활동을 펼칠 계획이신가요?
아라리오 뮤지엄과 디앤디파트먼트의 정착 이후 새롭게 형성될 상권이 잘 유지되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 아라리오 제주에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라리오 로드와 지역 내 기존 콘텐츠의 연계를 통한 공간의 확대·개편을 준비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라리오 제주는 오랫동안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콘텐츠와의 융합을 꿈꿔왔습니다.
예를 들어 인근 해수사우나 였던 건물의 내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목욕탕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팝업스토어를 오픈하는 계획을 꼽을 수 있겠죠. 이 팝업스토어는 6월 중 오픈 예정에 있습니다. 3년 전 영업 종료 후 공실 상태를 이어가고 있는 서울관광호텔을 스타트업 기업이 사용할 수 있는 공유 오피스로 바꾸는 계획도 구상 중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프로젝트의 주체가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제주를 찾는 천만 명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계획했다면, 이제는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분들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구체화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이 먼저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찾는 공간이 늘어난다면 가장 제주다운 색채를 가진 지역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앞으로 탑동이 더욱 제주다운 마을로 인식될 수 있도록 아라리오 제주 역시 모든 역량을 기울일 다짐입니다.
제주탑동광장 야경 (출처: 제주관광공사)
‘제주다운 마을’로 변화할 탑동이 기대가 됩니다. 아라리오 제주가 바라보는 탑동의 잠재력도 궁금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주도의 문화를 직접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아라리오 제주의 목표입니다. 이를 통해 빌바오 구겐하임과 뉴욕의 모마 등 미술관을 중심으로 한 소위 ‘문화예술 상권’을 제주도에서 구현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되고자 합니다.
또한 탑동이 보유하고 있는 다양한 잠재력을 수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지역 활성화의 물꼬를 트고 싶습니다. 탑동에는 오랜 역사가 녹아있는 건축물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자원들이 넘쳐납니다. 널찍한 광장이 대표적이죠. 만약 이곳에서 전시회를 열거나 미국프로농구(NBA)의 스타선수를 초청한다면 시너지가 엄청날 것입니다. 문화와 예술을 중심으로 제주도에서도 가장 특색있는 동네를 만드는 것이 아라리오 제주의 방향성입니다.
새롭게 형성된 도시에 비해 역사가 깊은 원도심 혹은 구도심은 지역 곳곳이 다소 낡고 활력이 덜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주민들과 동고동락해온 원도심은 그만의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른바 신도시에서는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역사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죠. 비단 탑동뿐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 위치한 원도심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아라리오 제주 또한 탑동이라는 공간이 원래부터 보유하고 있던 힘에 문화와 예술을 얹은 것뿐입니다. 아라리오 제주가 바라본 탑동은 완벽한 인프라와 조건을 갖춘 훌륭한 공간이었습니다. 다만 도민 및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을 이유, 즉 ‘콘텐츠’가 부족했을 따름입니다. 아라리오 제주는 이 부족한 콘텐츠를 채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